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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1일 / 언어의 창조적 위력 ①
시편 23:1-6

   우리가 입으로 하는 말에는 놀라운 힘이 있습니다.  잠언 말씀에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 쟁반에 금 사과”(잠 25:11)라고 했습니다.  은 쟁반은 얼마나 귀한 그릇입니까?  그런데 그 쟁반 위에 아무것도 없으면 얼마나 허전합니까?  또 그 쟁반 위에 금 사과가 놓여 있으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아무리 좋은 환경, 좋은 사람이 있어도 한마디 감사하는 말, 찬양하는 말이 없으면 생명도 빛도 작용하지 않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 그 상황에 알맞은 격려의 말이 있고, 사랑의 말이 있어야 관계가 열리고 아름다운 열매가 맺힙니다.  그래서 시인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누가 나의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나도 그에게 가서 그의 꽃이 되고 싶다”(김춘수, 꽃).  이와 같이 말은 인간관계에서 엄청난 능력을 발휘합니다.  사람의 아들로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은 천국 사역을 말씀으로 진행하셨습니다.  죄를 사하실 때도 말씀으로, 병자를 고칠 때도 말씀으로 치유하셨습니다.  귀신도 말씀으로 쫓아내셨고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도 말씀의 형식으로 저주하자 곧장 말라버렸습니다.

   말은 창조적 능력을 현실화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보통 사람도 그 입의 말로 그의 운명을 바꾼다면 하물며 하나님의 말씀을 그 입에 가지고 있는 신자들이겠습니까?  예수님처럼 하지는 못해도 그 비슷하게는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요 14:12)”고 말씀했습니다.  예수 믿는 성도들이 하는 말에는 언제나 신자의 상부구조이신 성령님이 창조력을 발휘하십니다.  내가 시인한 말을 내 귀로 들을 때 그 말씀이 내 마음속에 믿음을 키워줍니다. “나는 못 산다. 나는 죽겠다”라고 자꾸 말하면 실제로 나의 삶에 파괴가 다가옵니다.  반대로, 담대한 마음을 가지고 믿음으로 “나는 할 수 있다. 나의 목표는 이루어지고 있다. 지금 하나님의 축복과 도우심으로 인해 나의 꿈이 아름답게 꽃피고 있다”  이렇게 긍정적으로 말을 하면 실제로 성공의 열매를 맺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나는 불행하다고 열 번을 말해 보세요. 불행을 느낄 것입니다.  반대로, 나는 행복하다고 열 번을 말해 보세요. 행복을 느끼지 않습니까?  불행의 문을 노크하면 불행이 들어옵니다.  행복의 문을 두드리면 행복이 찾아듭니다.

   심리학자들은 이런 행위를 가리켜 잠재의식을 일깨운다고 합니다.  잠재의식이란 마음속에 숨어있는 의식입니다.  현재의식을 통하여 마음속에 들어간 것은 전부 잠재의식의 창고 속에 쌓입니다.  우리가 말로써 잠재의식 속에 있는 믿음을 자극하면 잠재의식이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믿음으로 말하면 산도 옮길 수 있다”고 예수님이 막 9:23에 말씀하셨지요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여기 보면 기도하라고 하지 않고 말하라고 하였습니다.  현대의학에서 인간의 ‘언어중추신경’이 모든 신경을 지배한다는 설이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약 3:5-6의 말씀과 같이 들립니다. “이와 같이 혀도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하도다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  우리는 흔히 말이 앞서면 안 된다는 말을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말의 책임성에 대한 때만 맞는 말입니다.  이 세상에 말없이 된 일이 어디 있습니까?  의논 없이 경영된 일이 어디 있습니까?  말이 행동을 자극합니다.  말이 믿음을 잉태시킵니다.  믿음을 저해시키기도 하고, 발전시키기도 합니다.  열매를 맺게도 하고, 떨어지게도 합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행동으로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말씀이 앞서 발해지고 성령이 말씀 따라 운행하심으로 천지가 창조되었습니다.  또한 성경은 하나님을 말씀이라고 기록했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1:1)”  사람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어떤 피조물보다 뛰어난 점은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모든 문화는 모두 언어라는 위대한 매체를 통하여 이루진 것입니다.  아무리 위대한 사상도 언어로 표현되기 전에는 아무런 가치도 힘도 발휘할 수 없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말씀하시므로 거기 존재하시는 분이십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닮은 가장 중요한 요소가 말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처럼 언어생활을 누린다는 것이 곧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실천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언어를 인간에게 주신 것은 크나큰 사랑이자 굉장한 모험입니다.  사람은 자유의지를 가지고 하나님과 일치된 말을 할 수도 있고 반대되는 말을 할 수도 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과 일치된 말을 하면 순종의 열매인 생명을 얻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반대되는 말을 하면 불순종의 열매인 죽음을 거둡니다.

   정확하게 이와 같은 시험이 맨 처음 에덴동산에서 일어났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과 일치된 언어를 사용하지 않고 악마의 말과 일치된 말을 했습니다.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사탄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에덴동산에 선악과를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들립니다.  그 다음에 ‘죽을까 하노라’는 미혹 받은 하와의 음성이 들립니다.  마지막에는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도리어 자유를 얻고 하나님처럼 되리라”(창 2:17, 3:3-5)는 마귀의 말이 들립니다.  마귀가 하나님의 말씀을 꺽고 승리했습니다.  그 결과 인류의 삶 속에 타락이란 비극적 언어가 발생하게 된 것입니다.  그 타락한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또다시 들려옵니다.  복음이 무엇입니까?  복음은 타락한 세계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사망을 극복하는 복된 언어입니다.  예수님의 음성이 들립니까?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마 11:28-30).  오늘 우리들이 교회당에 나온 것은 이 복된 소리, 복된 언어를 듣기 위해서입니다.

   우리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늘 가을 성찬상에서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없는 동일한 말씀을 주십니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찢기는바 내 몸이니 받아라 먹으라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고전 11:23-26).  예수님은 우리의 죄 짐을 지시고 십자가 위에 올라가셔서 단번에 우리의 죄를 깔끔하게 청산하셨습니다.  그가 죽기까지 하나님께 복종하심으로써 나의 영원한 의가 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 있으면 죄인이 변하여 의인이 됩니다.  법적으로는 이미 성취되었고, 실제적으로는 현재 변화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복음으로 말미암아 이미 칭의 안에 들어왔습니다.  장차 영화로운 완전한 구원 속에 들어가도록 작정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도 평안함 가운데서 성화의 길을 활기차게 걷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범사에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셨습니다(히 2:17).  지금 우리가 하는 말의 요점은 이러한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를 의지하고 사랑합니다.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시는 예수님을 자랑합니다.  찬양하며 기념합니다.  이 복음 말씀에 순종하므로 생명과 복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우리는 복음을 전할 때 윤리적이고 교훈적이고 철학적인 언어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역사적 사건에 근거한 단순하고 직설적인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의 전하는 말씀은 복음적 언어로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 점에 있어서 분명한 입장을 천명합니다.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전 2:4-5).”  말씀은 창조의 근본재료입니다.  아담 이후 타락한 이 세계는 어둠과 죽음이 꽉 들어찼습니다.  이 세상에 빛과 생명을 가져오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뿐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재료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인 우리는 언어를 통해서 내 자신과 환경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우리들의 언어생활이 우리들의 삶을 지배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일체의 삶을 창조합니다.  그렇다면 언어생활에 얼마나 신중해야 하겠습니까?

   우리의 말과 우리 생활환경과는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잠 6:2에 “네 입의 말로 네가 얽혔으며 네 입의 말로 인하여 잡히게 되었느니라”고 했고, 또 약 3:2에는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고 했습니다.  만일 우리가 계속적으로 불행과 절망, 가난과 무능력에 대해 말하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러한 것으로 자신에게 굴레 씌웁니다.  많은 사람들의 대화를 들어보세요.  긍정적인 말보다 부정적인 말이 많습니다.  그러면서 왜, 나의 삶에는 그처럼 많은 슬픔과 고난이 오는가 의아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상은 자기 자신에게 그런 것으로 굴레 씌워놓았기 때문입니다.  마치 누에가 자기 입에서 나오는 비단 실로 자기가 들어갈 고치를 짓는 것과 같습니다.  상대적인 의미에서 의롭던 욥도 그랬습니다. “내가 두려워하는 그것이 내게 임하고 나의 무서워하는 그것이 내 몸에 미쳤구나 나에게는 평온도 없고 안일도 없고 휴식도 없고 다만 불안만이 있구나(욥 3:25-26)”  사랑하는 여러분, 사람이 변하려면 먼저 언어가 변해야 합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지만 입으로 시인해야 구원에 이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마음에 믿으면 구원이 잉태됩니다.  그러나 입으로 그 구원을 시인해야 실제적으로 구원을 체험합니다.  중생한 영혼이 승리하는 삶을 살려고 할 때 신앙 고백적 언어 사용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다음주일에는 ‘다윗 왕이 상용한 언어의 창조적 위력’을 시 23편 본문에서 되새겨 보겠습니다.

prayer
   우리들의 일상생활에 하나님의 창조적인 능력이 언어로 말미암아 나타난다는 사실을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우리는 운명과 환경의 아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의 자녀들입니다.  이 말씀을 올바로 사용할 수 있는 믿음과 지혜를 주시옵소서.  그래서 바꿀 수 있는 환경과 운명은 정복하고 지배하며 살게 하소서.  또한 바꿀 수 없는 환경과 운명은 하나님의 명령과 경륜 안에서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는 믿음과 용기를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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